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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연성과 핍진성이 있을때 비로소 재밌는 이야기가 탄생한다
by. 로로
*이 아티클은 로로 작가님과 픽글이 함께한 <작가가 맨땅에 헤딩하면서 알게 된 모든 것>의 내용 중 일부를 발췌했음을 밝힙니다.
개연성은 일어날 법한 일이나 전개를 의미한다.
작품의 앞에서 쌓아둔 내용에 충분히 부합하는 뒷이야기가 따라왔는가. 서사의 인과 관계가 타당한가. 원인이 되는 과거로부터 도출된 결과, 즉 이야기의 흐름이 자연스러운가.
갈등을 만들 때 중요한 건 개연성이다. 실제 있었던 일을 가지고 쓴다 해도, 그것이 작품 속에서 개연성을 갖출지 여부와는 상관이 없다.
예를 들어, 어떤 일을 당한 주인공이 작품의 처음부터 후반부까지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싸움의 기술을 배우고, 힘을 인정받기 위해서 수많은 노력을 했다. 그런데 결말부에서 주인공이 창밖에 꽃잎이 떨어지는 광경을 내다보다가 중얼거린다.
“허무하네….”
복수를 위해 온 인생을 투자하는 게 허무하다는 결론을 내버린 주인공이 돌연 복수하기를 포기한다. 그리고 결말부에서 주인공의 나레이션이 나온다.
끝까지 복수했으면 후련하기는 했겠지. 하지만 꽃이 눈처럼 쏟아지던 어느 날, 나는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현실에서 우리는 열정적으로 하던 일에 돌연 회의를 느끼기도 하고, 쉽게 그만두기도 한다. 이건 ‘개연성’이 필요하지 않은 현실의 일이다.
서사 작품 속 등장인물에게는 이런 식의 선택이 허용되지 않는다. 인물은 자신이 쌓아둔 정보들에 부합하는 선택과 행보를 보여줄 의무가 있으며, 만약 서사의 전반적인 부분을 차지하던 목표를 포기하려면 그 목표를 만들어 준 사건보다 더 크고 강한 사건이 다가와서 인물을 변화시켰어야 한다. 충분히 성장하거나 적어도 충격을 받을 필요는 있다는 의미다.
즉 개연성은 작가가 제시한 정보들을 취합한 결과다.
만화 <도라에몽>에서 노진구는 겁도 많고 공부도 못하고 매일 우는 소리밖에 못 하고, 부당한 일을 당하면 도라에몽을 찾는 게 전부라는 설정을 보여줬다. 그래 놓고 만화 10권쯤에 ‘노진구는 용감한 강아지를 보고 감명받았다. 이제 노진구는 용감해지기로 마음먹고 퉁퉁이에게도 맞섰다. 도라에몽도 노진구에게 자신의 도움이 더는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해 미래 세상으로 돌아갔다.’고 전개하면, 독자들이 납득할까?
잠깐의 감명으로 용감해지려고 마음은 먹었지만 퉁퉁이가 윽박을 지르자 금세 겁을 먹는 것이 작가가 보여준 ‘노진구다운 모습’, 즉 노진구의 성격이자 개연성이다.
작가는 자신이 이전에 전달한 정보가 어떤지 파악해둘 필요가 있다. 인물이 이전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게 하려면 그만큼 변화의 여지를 줘야 한다.
개연성이 부족한 작품을 보면 독자는 ‘이게 끝이야?’, ‘당황스럽다’, ‘갑자기 이렇게 된다고?’라는 반응을 보인다.
핍진성은 개연성과 유사하면서 살짝 다른 결을 가지고 있다. 개연성이 독자를 납득시키는 요소라면 핍진성은 독자를 끌어당기는 요소에 가깝다.
독자가 소설을 읽으면서 ‘정말 이런 인물/장소/이야기가 우주 어딘가에서 일어났을 것만 같다’고, 소설 속 세계에 몰입하고 그것을 현실처럼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핍진성이다.
설정이 아무리 비현실적이더라도 핍진성이 있다면 독자는 충분히 그것을 받아들이고 따라간다. 우리가 수많은 판타지 작품을 보면서 ‘에이, 마법을 어떻게 써? 말이 돼?’라고 하지 않는 이유는, 그 작품 자체가 가지고 있는 작품 내부의 설득력이 유효했기 때문이다.
핍진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작품에 나타난 세계의 모습이 일관적이고 견고해야 한다.
마법을 쓰는 세계관에서 지나치게 과학적인 물건(스마트폰이나 총, 자동차 등)이 나온다거나 SF 세계관에서 우주와 각종 행성을 넘나들던 우주선이 물에 빠졌다고 먹통이 되어버리면 독자의 몰입이 깨지고 세계관에 대한 의구심을 갖게 된다.
지브리 영화 <마녀 배달부 키키>는 마녀가 일반 사람들 사이에 섞여 사는 것이 자연스러운 세계가 그려진다. 이곳에서 마녀의 존재는 조금 독특하고 눈에 띄기는 해도 온 세상이 떠들썩해질 정도는 아니다.
그런데 후반부의 내용 전개를 위해서 갑자기 키키가 신문에 났다거나, 누군가 키키를 집요하게 취재하려 한다거나, 키키의 상태에 따라 마녀로서의 힘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내용이 나온다면?
독자(관객)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앞에서 마녀들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에 대해서 충분히 전달받은 줄 알았는데 갑자기 신문에 나서 곤란해진다고? 내가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 맞는지 헷갈리게 된다.
핍진성이 부족한 작품을 보면 독자는 ‘이게 왜 나오지?’, ‘원래 있던 설정인가?’, ‘이건 장르(혹은 세계관)랑 안 맞지 않나?’와 같은 반응을 보인다.
다음의 예시에서 핍진성과 개연성이 이야기에 작용하는 방식을 확인할 수 있다.
예시 1 : 개연성 부족과 핍진성 부족의 차이점
<사건>
철저한 조사 및 검증 결과, 기사단은 실종 사건에 마법사가 연루되었다는 결론을 낸다. 마법사 연구기관의 장로가 이를 인정하고 협조 요청에 응한다. 에단은 엘리엇의 병문안을 갔다가 엘리엇의 몸에서 기이하고 사특한 문양을 발견한다.
이후 에단에게 순찰이 아닌 정식 임무가 주어진다.
(1-1) 에단은 기사로서 첫 임무를 수행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실종 사건의 배후 중 한 명을 처치하게 된다. : 개연성 부족. (기사단이 이목을 집중하고 있는 사건의 배후를 신입 기사가 ‘우연히’ 처치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
(1-2) 에단은 기사로서 첫 임무를 수행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실종 사건의 배후 중 한 명과 마주쳐 대치한다. 그때 엘리엇이 나타나 권총으로 배후를 처치한다. : 핍진성 부족. (권총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던 세계관에서 뜬금없는 무기 사용)
예시 2 : 개연성과 핍진성을 고려한 이야기 전개
에단은 기사로서 첫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에단이 신입 기사인 만큼 선배인 로도스 경이 임무에 동행하게 된다. 두 사람의 임무는 고용인들에게 급료를 주지 않고 사라진 고용주를 찾아서 항구 도시에 다녀오는 것이다.
항구를 조사하던 중, 두 사람은 실종 사건의 배후 중 한 명의 뒤를 밟게 된다. 이후 대치하는 과정에서 로도스 경이 부상을 입게 되고, 두 사람은 고용주를 찾고 배후가 떨어트린 팔찌를 주워 온다.
: 에단이 신입 기사라는 설정이 있으므로 첫 임무가 너무 어려워서는 안 된다. (개연성) 임무를 의뢰한 사람은 고용주를 신고할 생각으로 기사단을 찾았고, 기사단도 인도적인 차원에서 인력을 배치했을 것이다.
그런데 에단과 로도스는 항구에서 예상치 못한 목격하게 된다. 납치 장면을 직접 목격한 것이다. 둘은 납치범을 따라가다가 실종 사건에 가까이 다가가고 만다. 바로 1장에서부터 언급했던 그 사건이다. (핍진성)
이처럼 개연성과 핍진성은 이야기에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작가는 자신이 앞에서 어떤 정보를 독자에게 전달했는지 반드시 알고, 일관성 있게 설정을 활용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