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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삶, 사랑으로 읽는 <안나 카레니나>

by. Park

흔들리는 삶, 사랑으로 읽는 <안나 카레니나>

겨울철 기차역에서 한눈에 반할 사람을 마주칠 확률은 얼마일까. <안나 카레니나> 의 사랑 이야기는 이 작은 확률에서 출발한다. 마치 운명적인 것 같지만 금지된 사랑 속에서 안나, 알렉세이, 그리고 브론스키가 펼치는 서사가 책의 전반을 구성한다. 톨스토이는 그들의 이야기 뿐 아니라 주변 인물들의 또 다른 에피소드, 그리고 그 사건들과 관련된 수많은 인물들의 행동과 심리를 자세히 묘사함으로써 당대 러시아 사교계를 직접 보는 듯한 현장감을 부여한다. 막장 연애 소설처럼 보이는 이 책을 통해 톨스토이는 사랑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삶이란 무엇인지 묻는다. 그리하여 인간은 어떠한 존재인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독자에게 물음표와 느낌표를 던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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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한 사회, 그리고 개인

안나 카레니나와 브론스키의 불륜은 사교계의 좋은 가십거리였다. 그들이 불륜을 저질렀다는 사실 그 자체보다는, 안나에 의해 표면적으로 불륜이 드러날 때 그들의 관계가 비난받는다. 사교계에서는 다른 불륜 사건들 또한 암시된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들이 저버린 도덕적 가치가 아니라, 이 사건들을 통해 생기는 가벼운 인연들과 이야깃거리이다. 모두가 자신의 모습을 숨기는, 그리고 그 모습들을 알면서도 묵인하는 러시아 사교계는 거짓과 위선으로 이미 점철되어있다.

가정교사와 바람을 피고도 자신의 행동이 자연스러운 것이라 생각하는 오블론스키, 안나를 응원해주는 것 같으면서도 그녀의 약점을 알고 유쾌해 하는 돌리, 아내의 불륜 사실을 알고 자신의 명예를 가장 먼저 걱정한 알렉세이, 어머니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적어질수록 더욱 공손하게 어머니를 대하는 브론스키, 그리고 안나를 칭송하다가 아들과의 관계가 맺어진 후 그녀의 죽음을 추악하다고 비난하는 브론스키의 어머니까지, 톨스토이는 작품 속 여러 등장인물들의 다원성을 통해 사교계의 모습을 드러낸다.

타락한 사회 속, 개인은 선할 수 있는가? 안나의 파멸이 안나 개인의 문제만은 아니었음을, 작가는 소설 전반에서 은연중에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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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이 유일한 구원이 될 때

안나 카레니나는 왜 죽음을 맞이했는가? 그녀가 구원 받을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그녀의 죽음이 도덕적 가치를 저버린 사랑을 선택한 것에 대한 신의 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작품 속에 나오는 수많은 불륜 사건 속, 왜 안나 카레니나만이 파멸했냐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안나는 자신으로서 살지 못한다. 타자로부터 느끼는 구속감과 답답함, 딱딱한 남편의 삶으로부터 탈출하려는 욕망은 또 다른 타자인 브론스키와의 사랑으로 귀결된다.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벗어나고자 또 다른 이가 유혹하는 세계 속으로 발을 들이게 된다. 그녀에게 자신만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톨스토이는 경마장에서 안나, 알렉세이, 그리고 브론스키가 처한 상황을 묘사하며 안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남편과 연인, 그 두 남자는 그녀의 삶에서 두 개의 중심이었으므로 ... (후략)’

두 개의 중심 사이에서 그녀는 끊임없이 흔들린다. 그녀의 흔들림은 죄책감, 정당화, 그리고 순간적인 절망과 행복을 넘나들며 다양하게 묘사된다. 그러나 자신이 디디고 서있을 세계가 없는 그녀에게 어떠한 결정도 확신을 주지는 못한다. 브론스키를 선택한 안나가 그의 사랑을 끊임없이 갈구하는 것은 이에 대한 증명이다.

https://pickgeul-asset.s3.ap-northeast-1.amazonaws.com/2d30a6da-6da4-4449-a2da-bab995d16e89-image.png죽음을 맞이하기 전까지, 안나는 브론스키의 사랑에 집착한다. 아들인 세료자를 종종 떠올리기는 하지만, 그녀의 삶에 남은 것은 결국 브론스키 밖에 없다는 결론에 여러 번 이른다. 그리고 자유롭고자하는 브론스키의 욕망으로서 자신의 삶의 기반이 흔들리자, 그녀는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녀에게 죽음은 복수였다. 자신이 죽음으로써 두 남자를 불행하게 만들고자하고, 자신의 죄를 구원받고자 한다. 더 이상 구원의 길조차 보이지 않는 그녀에게 파멸은 구원이라기보다, 예정된 일이었다.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는가. 알렉세이의 위선, 브론스키의 기만, 그리고 사회적 압박이 그녀가 파멸을 향해 가는데 동조한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녀가 파멸한 주된 원인은 자신의 삶을 만들지 않은 것에 있다. 도덕적 가치의 선택마저 타인에 의해 결정되도록 한 주체성의 상실에 있다. 그녀는 끊임없이 고민하고 고통스러워 하지만, 자신의 삶을 모르기에 사랑하지도 못한다. 그리하여, 다른 이의 삶을 사랑하지도 못한다. 자신으로 인해 누군가 고통 받기를 원하는 그녀의 오만함은 그녀가 파멸할 수밖에 없었던 궁극적인 원인을 보여준다.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은 부도덕적이다. 그리고 에로스적 사랑만을 표방한다. 그들의 사랑이 도덕적이지 못하다는 점은 제쳐두더라고, 그들은 육체적이고 순간의 욕망을 좇는 사랑만을 한다. 누구보다 뜨겁고 불타오르는 사랑을 했지만 서로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쌓아가는 과정은 없다. 서로에게 책임감을 가진 사랑이 아닌, 이끌림만을 가진 사랑을 하는 것이다. 이는 안나에게는 불안과 집착으로, 브론스키에게는 자유의 억압으로 다가온다. 그는 안나를 위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도 안나와 연인이 된 후 ‘자기의 욕망의 실현이 자신의 기대하던 행복이라는 산에서 겨우 모래알 하나만 주운 것 같다’고 말한다.

https://pickgeul-asset.s3.ap-northeast-1.amazonaws.com/4f44e5dc-2a12-4cb1-a3cf-271a59ab6c4c-image.png안나의 매력에 이끌렸을 뿐 책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던 브론스키, 그에게 모든 걸 맡기고 그가 주는 사랑만을 기다리는 안나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는 것이다.

반면, 알렉세이는 안나에게 책임감 있는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안나는 그에 맞춰 고고하면서도 명예로운, 남편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과연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사랑’ 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안나는 알렉세이에게 때로는 혐오감을 느꼈고, 알렉세이는 그녀의 불륜을 예감했을 때조차도 자신의 명예가 훼손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권위와 명예가 진실된 사랑보다 더 중요한 시대, 안나 카레니나는 어쩌면 두 가치를 모두 잃은 시대의 비운의 주인공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톨스토이는 어떻게 사랑을 말하고 싶었을까. 그는 레빈과 키티의 모습을 통해 진실된 사랑, 그리고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사랑을 그려낸다. 그런데 필자는, 그들의 모습이 ‘사랑’의 방법을 알려준다기 보다는, ‘어떤 삶을 살아야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다음 장의 제목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로 정한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레빈은 거의 유일하게, 사교계의 위선에서 벗어난 인물이다. 사교계에 발을 들이는 귀족들의 생활양식에서 벗어나 노동의 즐거움과 가치를 찾는 사람이다. 그리고 불륜이 암묵적으로 행해지고 결혼이 가볍게 여겨지는 사교계의 모습과 달리, 그는 낭만주의자이다. 스테판 아르카지치의 피상적인 연애관을 비판하며 순수한 사랑을 꿈꾼다. 그에게 결혼은 사회생활에 따르는 수많은 일들 중 하나가 아니라, 인생의 모든 행복이라고 묘사된다. 키티에 대한 청혼이 좌절되자 브론스키에 대한 열등감에 괴로워하면서도 결국 훗날 청혼에 성공하는 그의 모습은 그가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한 가치를 추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https://pickgeul-asset.s3.ap-northeast-1.amazonaws.com/af80667c-01df-4129-b5bc-2a12beeafe94-image.png눈에 띄는 점은 레빈이 무신론자였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 고민한다. 형의 죽음, 키티와의 결혼, 그리고 아이의 탄생을 보며 생과 죽음, 그리고 그 속에서의 인간에 대해 탐구한다. 키티는 그러한 그의 지지자 역할이 되어준다. 그들의 관계는 사랑과 질투가 혼재되어 있는 현실적 모습으로 표현되지만, 그럼에도 서로에게 성장을 돕는 관계이다. 레빈은 때로는 키티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만족한다며 그녀를 속으로 비난하기도 하고, 그녀가 죽음을 앞둔 형을 간호하는 모습을 보며 어딘가 불편한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는 끊임없는 고민을 통해 삶을 살아나간다. 그리고 그 성찰은 그의 아내, 키티로 인해 더 깊어진다.

https://pickgeul-asset.s3.ap-northeast-1.amazonaws.com/749e0e54-82ae-42c0-a430-862c05b9d299-image.png3권의 마지막 부분에서, 레빈은 ‘삶의 매 순간이 의미 있고 선의 명백한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깨닫는다. 동시에 그는 다른 종교들과 신적 존재의 관계에 대한 물음을 해결할 권리가 없으며 그럴 가능성도 없다는 것을 깨달으며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만을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인다. 레빈은 자신이 살아가는 삶을,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의 삶을 사랑하고자 하는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안나와 대비된다. 그가 얻은 깨달음이 결코 그의 삶을 극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은 그가 여전한 인간임을 증명하지만, 그 명제를 스스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은 그가 우리가 따라가야 할 인간상임을 동시에 증명한다.

톨스토이는 레빈을 통해 이미 타락하고 몰락한 사교계의 허풍을 비판하고자 했을 것이다. 질투를 느끼다가도 그 사람의 진실된 모습을 알아내는 관대함, 아내에 대한 진실된 사랑, 피상적인 가치 대신 인간의 삶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모습은 소설 속 분위기와 대비되면서 더욱 그를 건강한 사람으로 보이게 만든다.

키티와 레빈은 아름답다. 그들의 삶은 그들의 사랑의 아름다움을 넘어, 톨스토이가 제시하고자 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준다. 서로의 행동과 말에 의해 깨달음을 얻는, 함께하는 경험을 통해 스스로의 삶을 성장시키는 사랑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그들의 삶을 보여준다.


마치며

당시 러시아 사회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톨스토이가 제시한 사회상과 인물들은 여전히 현대에도 울림을 준다. 가장 이상적인 인간으로 제시되는 레빈조차도 질투, 욕망, 거부감 등 무수한 감정을 느낀다. 그런 점에서 인물들은 모두 인간적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물들은 진실을 덮고 권위와 명예, 그리고 사랑 등의 가치에 의해, (그리고 그 가치를 이해하지 못한 채) 자신의 삶이 끌려 다니는 것을 지켜만 본다. 타락한 사회가 먼저인지, 부정한 개인이 먼저인지에 대한 해답은 없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우리 내면의 모습들을 인물들을 통해 보여주면서도,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전한다. 그는 무엇을 하든 의미를 가진다는 깨달음을 찾아가는 레빈의 모습을 제시함으로써 인간의 삶이란 무엇인지 돌아보게 만든다.

인간은 자의식 과잉의 존재이면서도, 때로는 타율적인 존재이다. 그러나 자신의 힘으로 자신만의 삶을 가꾸어 나가지 못하는 것, 그리하여 타인과, 타인이 주장하는 피상적 가치에 자신의 몸을 맡기는 일의 끝에 구원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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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삶, 사랑으로 읽는 <안나 카레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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